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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야기] 창작물 속 협회는 무용지물이야

법인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법적인 필요에 의해 그 자격이 인정되어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있고, 또한 일정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 법인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복잡화되고 다변화되어 거대화된 사회에서, 자연인- 쉽게 말해 개인이 가지는 이런저런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돈이 돈을 벌고, 규모가 더 규모를 키우기 용이한 구조상 일정한 시점을 넘어서면 개인은 이러한 사회활동에 일정한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에 따라 허구의 존재에 법적인 자격을 부여하여, 보다 이러한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어 활동하게 되죠. 이를 통해 개인이 모든 걸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부족함을 집단으로 엮어 부담을 덜어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로 인해 자연스레, 이러한 법인은 그 설립의 주체인 개인과 무관히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설립 주체인 개인이 사망을 하건, 범죄를 저질러 쫓겨나건 간에 법인은 법인 그 자체로서 존속이 가능하죠. 뭐, 여기서의 법인에 대한 이야기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협회 등의 집단에도 적용가능한 이야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거대화되고, 영속성까지 생겨나는 집단은, 그 존재의의와 무관히 개인을 찍어누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법인격이 어쩌고 저쩌고 해 봐야 그 책임자가 그 법인의 힘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도 치명적입니다. 법인과 사장은 분리가 되어 있어 물어볼 수 있는 책임이라는 건 제한되는데, 법인의 도덕적 기준은 결국 개인 하나에만 맞춰져 있고, 그가 저지르는 패악의 수준은 개인의 일탈이나 사악함의 수준을 벗어나 버립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한국에는 미녀와 뱀파이어라는 이름으로도 방영되었던 이 작품엔 왓쳐 협회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협회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대체적인 설정에 대해 설명해볼까요?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에는 그 제목처럼, 뱀파이어 슬레이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저도 드라마를 본지 오래 되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설명해보기로 하죠. 아득한 고대, 지옥의 악마가 지상에서의 패퇴하여 지옥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하지만 지상의 파멸을 목표로 둔 그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죠. 그는 인간 하나를 사로잡은 후, 악마와 뒤섞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버피 세계관에 뱀파이어라는 것이 생겨났고, 이 뱀파이어는 온갖 패악질을 부리며 전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이러한 뱀파이어에 의해 인간의 피해가 계속해서 커지던 중, 아프리카의 주술사들은 이 뱀파이어를 물리치기 위해 궁극의 마법을 사용합니다. 바로 '뱀파이어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소녀를 매 세대 탄생시키는 주문'이었죠. 이 주문을 통해 인간은 뱀파이어의 하드 카운터라 할 수 있는 '뱀파이어 슬레이어'라는 존재를 갖게 되었고, 뱀파이어와 일종의 대극관계를 이룹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악하고, 자신의 동료를 늘릴 수 있으며, 그런 동료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미끼로까지 삼는 뱀파이어들. 하지만 뱀파이어 슬레이어는 그런 뱀파이어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뿐이지, 전체적인 세력면에서 너무나 약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리고 심지어 소녀만이 그러한 능력을 가질 수 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죠. 작중에선 보통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죽어나가는 것이 뱀파이어 슬레이어였고, 상대적으로 나이를 먹을 수록 강력해지는 뱀파이어와의 전력차는 갈 수록 커졌습니다.

 

이러던 와중 등장한 것이 바로, 슬레이어를 지원하기 위한 집단인 왓쳐 협회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여러 악마와 뱀파이어에 대한 조사를 통해 슬레이어를 지원하고, 슬레이어가 사망할 것을 대비하여 예비 슬레이어를 사전에 미리 확보하여 교육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슬레이어의 부재를 대비했죠.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기본적으로 협회는 플레이어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서 출발한 집단입니다. 플레이어가 없다면, 애초에 협회는 존재의 의의가 없습니다. 애초에 뱀파이어와 제대로 맞서싸울 수 있는 존재로 슬레이어가 세계관상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뭐라해도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협회는 자신의 영속성과 영향력 등을 이용해 슬레이어-플레이어를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명분은 있었습니다. 애초에 왓쳐는 슬레이어의 교육을 담당한다 천명한 집단이었고, 이를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하고 활동한 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슬레이어는 대개 10대중반의 어린 나이에 급작스럽게 능력을 얻기에 뱀파이어를 잡는 능력을 가진 것 외에 별다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슬레이어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한 협회가 지원하고 돕고 관리하는 것이 막상 이상한 일은 아니죠.

 

문제는 역전현상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협회가 슬레이어를 자기들 좋은 데에 써먹기 위해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과 네트워크, 자본을 바탕으로 슬레이어가 나서야 할 곳과 나서지 않아야 할 곳을 자의적으로 지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슬레이어가 죽어 사라지더라도 왓쳐는 존재하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들이 더 중요한 거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까지 하기에 이릅니다. 슬레이어라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에 대해 지원집단이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코미디처럼 여겨집니다만, 디테일한 부분을 보면 왜 저렇게 비틀리는지 이해가 됩니다.

 

슬레이어 자체는 아무리 오래 활동해봐야 40대는 커녕 30대 이전에 죽어 나가는 존재입니다. 거기다 슬레이어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누가 돕건 돕지 않건 어떻게든 악마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또한 슬레이어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한 사람의 인간인데, 인간이 가지는 사회관계에 대한 갈구를 감안하면, 슬레이어는 결국 협회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초자연적 현상에 둘러쌓인 슬레이어는 오직 한 사람밖에 존재할 수 없으니 협회 외에 제대로 된 집단을 형성할 수도 없고요. 더군다나 협회의 입장에선 슬레이어가 세대당 한 사람 뿐이라는 조건이 달리 작용하기도 합니다. 슬레이어가 세대당 한 사람뿐이라는 이야기를 달리 말하면, 어쨌건 슬레이어는 무슨 일이 있건 한 사람은 있다는 소리니까요. 관리하기 까다로운 자원이지만, 그렇다고 절대 바닥나지않는 자원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협회에겐 슬레이어의 분류는 더 관리하기 편한 자원과, 그렇지 않은 자원으로 나뉩니다. 애초에 악마와의 싸움은 천상계도 완전히 해결못한 일이고, 슬레이어 외에 또 다른 초자연 경찰 짓거리를 하는 이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당장에 닥친 위기만 해소하면 되죠. 애초에 슬레이어를 관리하고 육성해온 노하우가 있고, 슬레이어의 능력은 개개인의 재능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니 그에 대해 자신들이 책임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은 작중에서 '도움이 안되는 꼰대 집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작품을 보다보면 협회는 슬레이어의 행동을 직간접적으로 방해하곤 합니다. 위험한 장소에 보내면서 자기들은 아는 내용을 전달하지 않거나, 슬레이어가 관련된 내용을 찾는데 의도적으로 배제시키거나 등등등. 실제로 슬레이어를 더 부리기 쉽게 하기 위해 가족들로부터 떼어놓았다거나,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슬레이어다 싶으면 아예 위기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묘사가 군데군데 녹아 있습니다. 상술했듯, 결국 협회에겐 슬레이어는 더 쓰기 편한 쪽과 아닌 쪽으로 나뉠 뿐이니 슬레이어 개개인의 사정은 관심이 없다는 소리니까요.

 

 

결국 작중에선 협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문제만 일으키다 퇴장합니다. 애초에 슬레이어가 없는 협회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슬레이어가 "좀 그만하고 내려와라"라고 말한 시점에서, 협회의 존재의의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슬레이어 앞길을 막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슬레이어가 망하면 세계가 망하는 건데. 결국 버피 세계관 속 협회는, 여타의 창작물 속의 협회와 같이 별 쓸모 없는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애초에 주인공이 평탄하고 잘 나가는 걸 창작물이 지향하고 있지는 않죠. 주인공이 그러한 장애물을 박살내고 나가는 게 포인트니까, 이처럼이나 현실에서 찾아보기 쉬운 방해가 대입되었기에 창작물에서의 협회가 더 무능한 건지도 모릅니다.

 

지금와서 보면 애초에 제대로 굴러가는 협회라는 게 신기한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애초에 지원집단의 미덕은 필드를 뛰는 당사자들이 최대한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건데,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임과 동시에, 이게 완벽하게 이뤄지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필드의 플레이어가 가져가 버립니다. 이러면 협회는 묻혀 버리죠. 자신을 어필하겠다 마음먹은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어그러집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애초에 존재목적 외에서 찾으려고 하니, 모든 게 어그러져 버리는 거죠.

 

...지금 창작물 속의 협회 이야기하는 거냐고요? 그것 참 흥미로운 질문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