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셀 : 인류 최후의 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낚던 바로 그...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로 시작되는, 익숙한 어투가 있습니다. 예. 주말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방영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의 상투적인 말투죠. 하지만 괜히 하는 말투가 아닙니다. 이 말투는 재미없는 영화들도 재미있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거든요. 오죽하면 코미디언 김경식을 두고 사기꾼이라는 농담을 할까요.
오늘 소개할 영화, 셀 : 인류 최후의 날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보통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영화를 먼저 한 번 보고, 글을 쓰면서 또 한 번 보고, 쓰고 나서 또 한 번 보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기억에만 의존해서 글을 쓰면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은 내용까지 딸려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오늘 쓰는 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한 차례 접했고, 그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본 편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한 차례 봤고요. 그러다 유튜브에서 코미디언 김경식이 나와 "사람들이 나를 사기꾼으로 부른다"는 식의 말을 듣고 불현듯 떠올랐기에, 이렇게 다뤄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크게 세 가지가 존재합니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접한 후, 처음 본 이후, 그리고 두 번째 본 이후. 그리고 그 감상은 각각 "독특한 소재다. 기대된다.", "이게 뭐야...", "아... 그래서..."였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잘 나가는 만화가고 아들도 한 명 있지만, 결혼은 하지 않은 클레이(존 쿠삭이 연기). 공항에 도착한 그는 아내에 이어 아들과 통화를 합니다. 하지만 때마침 동전이 떨어져 연결이 끊어집니다. 동시에 통화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어 생명의 위협을 겪게 됩니다. 그들을 피해 공항을 빠져나가지만, 이 이변현상이 공항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고 아내와 아이를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톰(사뮤엘 잭슨)과 앨리스(이사벨 펄먼)와 동료가 되고요.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위협은 줄어들지 않던 와중, 그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악몽에 자신이 그리는 만화 캐릭터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화 소개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사실 굉장히 감탄했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주인공인 존 쿠삭, 새뮤엘 잭슨, 이사벨 펄먼 모두 좋아하는 배우에 속했고, 좀비물과 유사한 구조지만, 그 발단을 달리 한 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인 이유가 아닌, 전화 통화를 통해 감염되고 전파된다는 것은 이제는 편의적으로만 쓰이는 체액감염 좀비류들에 비하면 훨씬 피부에 와닿는 것이었거든요. 더군다나 전화기를 통해 감염된 이들이 마치 전화벨과 비슷한 소리로 울어대는 것은 인간의 사물화와 비슷한 공포마저 느끼게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 이해할 수 없는 이변의 근원이, 사실 주인공이 만들어낸 가상의 캐릭터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떡밥은 단순한 생존물, 좀비물과는 또 다른 방식의 접근법을 제시하는 것이었기에 기대가 작을 수 없었죠.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영화의 장점은 그 정도에서 그칩니다.
이야기의 발단 부분은 정말로 흥미롭지만, 전개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상당히 판에 박힌 듯 흘러가기 시작하고, 위기와 절정 부분에선 제작진도 자기들이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줍니다. 결말도 어떻게 마무리를 못하니 그냥 던져버렸다는 느낌이고요.
...정말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걸맞은 영화였던 셈입니다. 보통 위기 부분까지만 설명하고 넘어가는 영화 소개프로그램 최적화된, 소재와 배우는 좋은데 전개와 결말은 허접한....
어거지로 해석해 보자면 아마 이런 영화였을 겁니다.
전화기를 통해 감염되는 것은 현대사회의 구조에 의해 부속화되고 획일화되는 인간들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그 왜 있잖아요. 손목시계를 찬 사람들은 스스로를 저 장치의 노예로 만든다는, 현대인을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과 통찰 우화처럼 말이죠.
이 통화라는 것은, 이제는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조차 문자로 해결하는 세대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숨결을 느끼는 것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화통화가 과연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적어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단순한 통화는 사람의 개성과 특성을 덜어내 버립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수가 되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들로 만들어버리죠.
그렇다면 클레이가 만들어내고, 다른 생존자들이 악몽 속에서 계속해서 접한 붉은 후드티의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요? 이건 정말 끼워 맞추기입니다. 영화는 이 남자가 그들의 현실을 망하게 만들었고,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저런 이미지를 통해 전달합니다만, 그가 소위 말하는 알파형 몬스터- 그러니까 특정 괴물들의 기원이 되고 지능이 있고 없고 정도의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괴물이라는 점 외엔 별다른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화는 클레이가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과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죠. 결국 다시금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가족을 찾는 것인데, 이 붉은 후드티의 남자가 그것을 방해합니다. 아내를 가로채고, 아들을 납치했죠. 결국 후드티의 남자는 진실된 소통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건데, 그 방해하는 존재를 클레이가 스스로 (만화 캐릭터로서) 만들어냈단 말이죠. 자신이 꾼 악몽에 나온 존재라면서요.
결국 진정한 소통을 위해선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제약과 허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거고,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대략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저렇게 구성하기 위해선 보다 유기적인 구성을 취했어야죠. 예를 들어, 말은 저렇게 했지만, 붉은 후드티의 남자는 분위기 잡기용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두머리 괴물일 뿐,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근원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로는 전혀 기능하지 않습니다. 강렬한 화장실씬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캐릭터도 많습니다. 상술한 저 세 사람 외에 이런저런 캐릭터가 더 나오는데, 격하게 말해 주인공인 클레이 외엔 그냥 다 안 나와도 됩니다. 다른 캐릭터들과 하나마나한 대화를 하는 대신 붉은 후드티의 남자에게 쫓기는 환상을 그려 넣으며 온전히 주인공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됐으면, 그래도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긴 이건 1408의 재탕이라는 소리를 듣겠네요)
그나마 주인공과 대등한 입장에서 말상대하며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지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톰과, 그나마 또 다른 피보호자인 앨리스가 유의미하게 기능합니다. 그 외엔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것에 대해 창작자가 입을 빌어 설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오지 않았아도 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설명해 주는 역할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뻔하고 두루뭉술할 뿐입니다. 좀 전에 제작진들도 딱히 왜 그런지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여기서 기인하고요. 역할이 겹치는 것도 있습니다. 영국꼬마와 앨리스의 비중은 서로를 잡아먹는 관계에 가깝고, 영국인 교장과 이후 나오는 자폭남은 중언부언할 뿐입니다.
어찌 보자면 전형적인 스티븐 킹 원작의 호러 영화입니다.
웰메이드 호러 영화는 보통 저렴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아이디어와 특이한 연출로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류에 속합니다. 그래서 다소 마무리가 약하더라도 어느 정도 감안되기는 하죠. 이 영화가 딱 그렇습니다. 아이디어는 좋고 전개까지는 흥미로운데, 결말부로 가는 과정은 지지부진하고 뻔합니다. 그렇잖아도 스티븐 킹의 평가 중 결말이 약하다는 평가가 있는데, 영화가 그것을 보완하기는커녕 심화시켜 버렸으니... 좀 전 영화 제작자들도 잘 모르고 그냥 만든 거 같다는 평가 역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뭐 그래도 배우들 보는 맛도 있고(가끔 진지하게 연기하는데 웃기기도 합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흥미로우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물론 가장 재밌게 보는 방법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접해서 보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은 계속 듭니다만.
사족1. 영화 제작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합니다. 원래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제작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떠나고, 아예 엎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다 이후 배우들 면면이 드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기대작으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이것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티븐 킹 영화는 그것이 개봉하기 전까지 2010년대 들어서 영 좋지 않다는 평을 듣기도 했었죠.
사족2. 제목이 휴대전화를 의미하는 Cell입니다. 국내에선 셀 : 인류 최후의 날이라고 하여 추가적으로 부제를 붙였습니다. 워낙 간단한 제목이라서 반대로 기억하기가 좀 어려운 영화기도한데, 일단 The Cell이라는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영화가 있기도 하고(이쪽도 호러무비에 가깝죠), 폰이라는 하지원 주연의 한국 호러 영화와 함께 손현주가 주연한 한국 영화 더 폰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매번 헷갈립니다.
사족3. 외국의 평가를 보면, 소설을 먼저 보라고 합니다. 저는 애석하게도 읽지 못한 채로 영화를 봤네요. 그들도 소설에 대해 결말 부분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보다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애초에 스티븐 킹 자체가 특정한 장면에 꽂힌 후 그를 중심으로 소설로 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소화한 이후엔 이야기에 힘이 빠져 버리는 것이죠.
사족4. 영화 곳곳에 스티븐 킹의 소설과 두 주연배우가 출연했던 1408의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 볼 때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