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정말 너무 무난한 영화
저는 흔히 뱀파이어 콘텐츠를 분류함에 있어, 흔히 세 분류로 나누곤 합니다.
첫째,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 둘째,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가 바탕이 된 콘텐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더월드류의 어반 판타지 콘텐츠들.
편의상 저렇게 나눴지만, 사실 저 분류법은 뱀파이어 콘텐츠의 변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브람 스토커의 소설의 캐릭터 드라큘라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저것의 반대를 상정하여 만들어진 것이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콘텐츠이고, 그 과정에서 더 장르적이고 오락적인 스탠스를 취한 것이 바로 언더월드류의 어반 판타지 콘텐츠니까요. 실제로 이건 작중 시대적인 배경과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예 19세기 이전에 모든 이야기적 정리가 이뤄지는 브람 스토커의 소설류, 고대에서 기원을 찾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20세기 후반인 앤 라이스의 소설류, 20세기 후반에서 아예 미래상까지 배경으로 소화하는 어반 판타지류처럼 말이죠.
브람 스토커의 소설을 기원으로 하는 콘텐츠들은 기본적으로 고풍스럽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이는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된 역사적 인물의 행적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여기에 더해 프란시스 코폴라의 90년대 드라큘라의 영향이 강하게 덧씌워졌습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 포로가 되고, 성장해 외세에 맞서 싸우고, 주변의 배신이나 불운으로 아내를 잃어 실의에 빠지고, 종교적인 실망과 이에 대한 구원과 타락이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등을 다루는 콘텐츠들은 사실상 이것이 바탕이 되었다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콘텐츠의 유행이라는 것은 돌고 돌기 마련입니다. 브람 스토커의 설정을 부정하던 앤 라이스류의 콘텐츠들은 버피와 뱀파이어, 트와일라잇, 뱀파이어 아카데미 류 등의 콘텐츠를 통해 크게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그 인기를 이어가고 있지만, 어느 순간 다시 고전적인 인상을 주는 브람 스토커의 콘텐츠로 흐름이 이어지고 있죠.
오늘 이야기할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은 이러한 흐름에 놓여져 있는 작품입니다. 굳이 굳이 따지자면 90년대 드라큘라 영화의 프리퀄 느낌을 주죠. 다만 실제로 이야기적인 흐름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굵직한 설정과 아주 커다란 캐릭터의 몇몇 특성을 따와서 만들어진 이야기거든요.
이 영화의 장르는 판타지 액션으로 호러적인 색체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호러 영화의 미덕인 기발한 연출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인상적인 장면들을 무난히 녹여내었습니다. 배우들도 특별히 빠지는 거 없이 연기하고 비주얼도 훌륭합니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던 고전으로 접어든 영화들의 프리퀄을 자처하기엔 다소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나쁜 건 아니지만, 특별히 좋다고 말하기는 힘든 그런.
또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캐릭터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만들어지는 작품들 특유의 과감한 재해석 같은 것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언젠가 썼던 드라큘라 2000-드라큘라는 유다이며 그가 예수를 뱀파이어로 만들었거나, 혹은 예수가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의 과격한 재해석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지극히 안전하고 뻔한 선택만을 하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변화라는 것도 사실 거의 없습니다. 주인공 캐릭터에겐 몇가지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포로로 잡혀갔기에 존재했던 트라우마의 재발, 아내의 죽음, 뱀파이어로서의 각성, 자신의 희생, 백성들의 배신, 아들에 대한 구출 등등등... 하지만 그는 이야기가 끝마쳐지는 시점까지 뱀파이어로 변했다는 사실 하나를 제하면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멋진 모습을 유지하는 신사였죠. 실제로 환생한 자신의 아내를 만난 후 아무런 고민 없이 새로이 사랑을 시작합니다. 깊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서 별생각 없이 무난히 볼 수 있습니다.
참 무난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처했던 위치를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마블이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통해 압도적인 흥행을 기록하던 그 시절, 다른 영화사들도 독립된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예고편으로 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꿈꿨고, 다크 유니버스라는 이름으로 호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이 영화는 그 다크 유니버스의 시작점이었고, 캐릭터만이 아니라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근원과도 같은 위치였기 때문에 커다란 모험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반대로 그로 인해 지극히 무난한 영화가 나와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을 듣게 되었지만...
극장에서 보는 영화로야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지만, 한 번 날 잡아서 뱀파이어 소재의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면, 한 번 꼽아 넣어 볼 법한 영화 기는 합니다.
사족1.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라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본격적인 전개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 테죠.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를, 적당히 강한 드라큘라와 다른 괴물들이 협력해 물리치는, 소설 드라큘라의 현대식 재해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다 엎어졌지만.
사족2. 루크 에반스를 대표하는 이들의 비주얼이 좋습니다. 혹자는 이걸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라고 하곤 하더군요.
사족3. 92년작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94년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래로 뱀파이어 소재의 영화가 흥행하는 일이 종종 있곤 했습니다만, 영화적인 완성도나 화려함 측면에서 이들을 따라가는 영화가 쉽게 나오지 않기는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