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내 멋대로 영화 배틀로얄 해석 7개
얼마 전 치지직에서 배틀로얄 같이보기 상영회를 하고 있단 글을 썼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해당 영화를 보는 이들의 방송을 연달아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 자체를 보기보단, 그 영화를 보는 스트리머들의 반응을 보게 되었는데,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영화를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이들을 감상하는 기회라는 게 사실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흥미롭게도, 영화의 몇몇 포인트에서 그들이 보이는 상이한 또는 엇비슷한 반응을 보다 보니 영화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는지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알아보려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난해한 마무리는 많은 해석을 낳기도 했죠.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해 보고자 합니다.
해석글인 만큼, 당연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영화는 영화, 소설은 소설, 만화는 만화입니다. 제각기의 각색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틀을 공유하면서도 각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원작자는 영화를 두고 자기의 작품과는 엄연히 다른 작품이라 평하기도 했죠. 그러니까 원작이 갖고 있는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참조의 대상일 뿐, 영화의 해석은 온전히 영화만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그래서 좀 시니컬하게 시작해서, 과장된 방식으로까지 나아가려 합니다. 사실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부분이고 어디에서 더 와닿거나, 덜 와닿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나아가려 합니다. 부담 없이.
가장 처음 떠올린 해석은 영화만의 각색은 특별한 의미가 없이 사회적인 시선에 타협한 결과이며, 이는 제작진의 어쩔 수 없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겁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성을 주요한 소재로 삼아 몇 분마다 에로신을 등장시키지만, 동시에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심어놓았던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에로 영화가 기본적인 판매가 담보되기에 상업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고, 동시에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눈에 띄면 그걸 검열하려고 하니 반대로 궤가 조금 다른 에로 영화에 그것을 심어 메시지를 살렸던 것이죠. 흔히 뜬금없이 결말부에 교훈을 주는 식인 영화들도 있었습니다.
약간 궤는 다르지만, 배틀로얄도 그러한 식이라는 겁니다. 배틀로얄은 그 자극적인 소재로 인해 사회적인 논쟁을 끌 게 뻔하니, 적당한 핑곗거리를 댈 만한 안전장치를 심어둔 겁니다. 뭘 어떻게 각색하건 간에 '학생들을 미친 환경에 몰아넣고 갖고 노는 어른들과 사회구조'라는 틀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억지로 '학생들의 문제와 그로 인해 고통받은 선생'이란 소재를 끼워 넣은 거죠. 상단에서 권력으로부터의 검열을 피해 에로장르를 북가시켰던 것처럼, 영화의 안정적인 개봉과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뻔히 보이는 작위적인 요소를 끼워넣은 거죠. 굳이 기타노 타케시를 선생으로 캐스팅한 것도 대중성이라는 이름의 안전장치였는지도 모르고요.
실제로 이 영화는 저러한 타협으로 인해 상당히 이야기적인 완성도에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개봉했고, 어쨌든 흥행했으며, 어쨌든 커다란 영향력을 남겼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신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구세대들의 한탄이라는 겁니다.
이 영화는 말미에 "대체 내가 너 같은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식으로 끝이 납니다. 심지어 이 이야기의 대상이 된 아이는, 자신을 죽여줬으면 하고 바랐던 '유일하게 자신을 좋아해 주고 진심으로 대해 준 학생'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선생을 배어버린 칼을 몰래 가져간 뒤 버리려고 했지만, 그게 결국 자신의 보물이 되었다 말합니다. 이 결말은 너무 기괴해서 영화의 인상을 한 순간에 바꿔버릴 정도였으며, 온갖 해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로 간의 상처의 공유라느니,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는 낫지 않지만 그것은 다른 이에 의해 나을 수 있다느니 등등등 별 이야기가 다 나왔죠.
이 두 번째 해석의 경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구세대는 자기의 방식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했지만, 학생들은 그것을 거부했고, 자신을 이해해주고 있다 믿었던 유일한 학생조차 사실 자기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학생이 자기를 좋아한 건 맞지만, 좋아하는 방식도 이해가 가질 않고, 왜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죠.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급변하는 시기를 거쳤습니다. 어떤 학자는 현대의 60살의 장년과 10대 청소년은 서로 말만 통하지 사실상 다른 대륙에 사는 사람 정도로 큰 정서적인 차이를 갖고 있으며, 이걸 이전처럼 단순히 세대차이로 표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구세대가 신세대에 느끼는 이질감은 일종의 공포와도 맞닿는 면이 있으며, 이러한 신세대가 보이는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구세대가 대화나 서로 간의 이해나 배려가 미덕인 시대의 사람도 아니니, 이들에게 접근하려 할수록 두 세대 간의 단절은 더욱 심해지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구세대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하나뿐인 겁니다. "내가 진짜 니들한테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거냐."
세 번째 해석은 교육환경에 대한 비판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원작에서의 주제와도 이어지는 것입니다만, 거기에 학생들이 발생시키는 문제도 심각하다는 식의 양비론적인 변화가 작용하였습니다.
원작에선 학업의 무한경쟁에 밀어 넣어 대다수를 도태시키는 것은, 사실상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드는 배틀로얄과도 다를 바 없다 비유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배틀로얄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신체적인 조건상 남성임에 분명함에도 작품은 결과를 보면 우승자의 남녀비율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며 이야기합니다. 이건 애초에 작중의 배틀로얄 자체가 목숨을 건 육체적 정신적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학업의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재해석해 갖다붙인 흔적이라고 봐야하는 겁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무한경쟁의 체제에서의 학생들의 삶이라는 건 이 배틀로얄과도 다를 바 없다 이야기하죠. 누군가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누군가는 순응하여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하여 남을 괴롭히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격렬히 거부하며 기존의 시스템을 뒤엎으려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가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무수히 볼 수 있는 것들이죠.
영화는 여기에 학생들의 잘못도 같이 끼워 넣습니다. 한국의 30년 후를 알고 싶으면 일본의 지금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야구로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실제론 인문학이나 법학 등에서 사용되기도 했던 표현이고, 실제로 인구문제나 사회문제 등에서 한국이 가장 많이 참조하는 것이 일본이라는 것도 유명한 일입니다. 지금의 한국이 10대 청소년의 범죄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것처럼 당시에 일본도 이로 인해 많은 문제를 겪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러한 당대의 사회문제를 영화에 삽입하여 보다 시류성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사회 탓으로 퉁치기엔 문제가 있는 학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해지게 만드는 요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띕니다. 첫째로 기타노의 역할은 단순히 그릇된 교육환경에서 비롯된 선생역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군의 지휘관이고 시스템의 진행자였죠), 둘째로 기타노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며 비난한 현 담임은 정작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걸었고 결국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점(아이들을 계도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울리기만 하는 존재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사실 작중에서 그거 그려지지 않았으니 과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온갖 외적인 방식으로 시스템에 개입한 것은 결국 기타노였다는 점(사전에 참여자를 줄여버린다거나, 주인공 일행에 호의적인 인물을 심어둔다거나, 위기에 빠졌을 때 등장해 구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노골적인 것까지) 등등으로 인해 이야기적인 합치성은 사실 꽤 떨어집니다.
"선생 니들이 고생하는 거 알겠는데, 애초에 학생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선생 니들한테도 문제가 있잖아"라는 스탠스가 어쩌면 이 영화의 중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도 덜어버리고, 영화의 절대적인 분량은 배틀로얄 시스템으로 채워진 상황에서 저게 얼마나 와닿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학생들만 탓하는 영화로 본다 해도 딱히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네요. 그래서 더 기타노의 마무리 행적이 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군인들을 모두 물린 후에 학생들의 손에 스스로 죽는 결말을 유도하고, 자신의 딸에게 남을 미워하려면 너도 미움받을 생각을 하라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습니다만 뭐 딱히...
개인적으론, 교육환경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기타노의 죽음은 그 정도로 무게감이 없습니다. 제가 이전에 자살미화 어쩌고 한 것도 그러한 논지에서 비롯된 거고요. 애초에 여기에 기타노 타케시라는 이름으로 캐스팅된 것도 영화 캐릭터가 아니라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 구세대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연예인이 영화상의 캐릭터들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하며 관객들의 속을 풀어주기 위해' 나온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을 정도입니다.
네 번째 해석은 기타노와 여주인공의 러브스토리라는 겁니다.
여주인공이 사실 기타노 딸 아니냐, 사실 두 사람이 원조교제 관계가 아니냐는 이야기는 배틀로얄의 주류해석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소수해석인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목숨을 걸고 서로 고백하는 일이 일상인 작중의 세계관에서도 유달리 튑니다.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의 대화는 배틀로얄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대한 요소이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주요한 요소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보다 특별하게 보는 것이 이상한 일만도 아닙니다. 이 해석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사제관계가 아니라 남녀 간의 애정관계라고 본 결과물입니다.
여자주인공은 왕따고 또 제대로 가족관계가 작중 설명되질 않습니다. 다만 적지 않은 확률로 가정에 문제가 있을 거란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작중의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사실상 한 덩어리인 캐릭터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부모의 부재가 존재했을 겁니다. 그리고 학급에서 왕따여서 단체행동에서 배제되는 일도 심심찮게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타노는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집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고, 학교에선 학교대로 제대로 된 선생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학생이 흉기를 휘두르는 일에 제대로 대응도 못해 선생일을 그만둬버렸다는 묘사까지 나옵니다. 심지어 학급 전체로부터 수업거부까지 당하기까지 합니다. 두 아웃사이더가 엮이는 이야기는 그리 드물지 않죠.
그는 여주인공이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수한' 여주인공에게 호감을 가질 법한 인물을 납치하여 프로그램에 참가시키고, 여주인공 곁에 붙여놓을 인물도 수배해 놓습니다. 더 나아가 아예 여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직접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내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그녀를 구해냅니다. 너무 작위적이고 배틀로얄이라는 창작물의 기본틀을 무시한 각색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창작물에서 이러한 비틀린 개입을 용인하는 경우가 크게 셋 있는데 첫째로 그것이 작중에서 묘사하는 비판의 대상인 경우(그래서 작중에선 이걸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둘째로 그것이 이야기의 흥미를 더욱 크게 돋우는 오락적인 시선에서 비롯되는 경우(보통 주인공 억까물이 여기에 해당하죠), 그리고 마지막이 사랑인 경우입니다. 실존하는 사랑이라는 놈이 원체 비논리적이고 엉망진창이며 이로 인한 무수한 사례가 현실에 존재하는지라 "사실은 사랑이었어"로 뭉개고 가는 클리셰마저 생겨났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 과정이 너무 작위적이라 "애초에 여주인공이 우승했겠네"하는 이야기도 적잖게 튀어나왔고, 실제로 이야기의 흐름만 보면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각색되며 커다란 비중을 분배받게 된 여주인공이지만, 정작 작중 뭘 했느냐고 물어보면 "사실 딱히 한 거 없다"는 이야기로 결론 내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죠. 심지어 기타노와의 마무리조차 여주인공이 직접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표리일체 격인 남주인공이 해결하긴 하지만.
여하튼 여주인공은 결국 기타노의 바람대로 끝까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그 사이에 끼어든 마찬가지로 순수한 남주인공을 통해 단죄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기타노 자체가 워낙 튀고, 여주인공의 행적도 기이하며, 배틀로얄이라는 틀을 해 칠정도로 각색이 되었으면서도, 작중에 이걸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아서 나온 해석이었습니다. 원작을 아는 사람들은 기겁할 해석이지만, 동시에 왜 원작과 이 정도로 다르게 각색을 했는지 따져보라는 사람들에겐 의외로 많은 걸 해결해 주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다섯 번째 해석은, 원작 소설의 메시지를 생각하자면 의외라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극우미디어로 변질된 결과물이라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술했듯 원작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무한경쟁에 떨어뜨린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양비론적으로 해석하여 학생들에게도 잘못은 있지 않냐는 식의 메시지를 삽입했고, 학생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또 가정으로부터는 케어받지 못하는 기타로라는 인물을 굳이 끼워 넣어 온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타노는 이야기의 말미에 마치 자신이 이런 사회적인 시스템의 원죄를 지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양 자신의 죽음을 찬양하며 스스로를 희생하기까지 하죠. 자신만은 특별한 양 굴면서.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회의 시스템을 만든 건 구세대입니다. 벌어진 잘못에 대해 학생 개인에게 잘못을 물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사회적인 구조의 병폐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겁니다. 온갖 끔찍한 학생들의 범죄를 보는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기 쉬운 게, 그 학생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책임을 묻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마치 이 사회적인 문제를 이 학생들에게 묻고 책임 지우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는 것입니다. 아니죠. 당연히.
영화는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흔적만 남았습니다. 원작에선 타이틀만 선생이지 실상은 정부의 관료였던 이 캐릭터를 진짜 선생으로 고친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이 캐릭터는 작중에서 선생보다 시스템의 진행자겸 지휘관으로서 끼치는 영향력이 훨씬 큰데도 말이죠. 영화의 주요한 분기점에서 엄연히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군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참 신기하죠?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과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죽음으로 몰아간 무수한 신세대의 목숨은 파리취급하면서, 기타노만은 특별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반면 이 시스템을 거부한 혁명가들과 이 시스템을 거부한 유일한 어른인 현 담임선생은 이용만 당한 채 처참하게 죽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감시받는 것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슈야의 아버지도 딱히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고요. 그렇다고 시스템에 굴복하거나 그에 적극적으로 응한 사람들은 달랐나? 그것도 아닙니다. 시스템에 굴복한 사람들은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고, 이를 이용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이 깔아놓은 길을 걷다 적당히 쓰임새가 다 되었다 판단된 후 그대로 처리되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 영화에서 살아남는 이들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입니다. 원작에서 남주인공은 나라에서 금지한 록음악을 좋아하고 야구부활동을 하다 이들의 군대식 문화가 싫어 때려치운 반항아였는데, 이 색채가 완전히 덜어졌습니다. 그냥 인기 있고 운만 좋은 캐릭터가 되어 버렸죠. 여주인공은 원작에서도 딱히 큰 비중이 없었는데, 여기선 기타노와의 에피소드를 제하면 그냥 없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배틀로얄 물에서 어떠한 캐릭터가 결국 살아남느냐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힘이 실리는 결과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는 사실 꽤나 찝찝한 각색이고 결말입니다.
작중 기타노는 구세대들이 신세대들에게 떠넘긴 사회적인 병폐의 짐을 다시 되돌려 받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예수처럼 희생하는 것을 통해 영화를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애프터 케어까지 받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힘드니까 니들은 좀 잘 대해주라라는.
사실 딱히 감정적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런저런 장치-고난 받는 선생, 가정에서의 소외 등-가 되었음에도 기타노에게 딱히 몰입할 수 있지 않기도 할뿐더러(애초에 진짜 죽고 사는 문제를 겪는 캐릭터가 수시로 등장하는데 저 정도 수위에 몰입을 할 수 있을 리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저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머리가 먼저 인식해 버리니까요. 개인적으로 꼽은 절정부는 총에 맞은 이후 딸과 통화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되살아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니까 죽긴 죽을게. 니들이 바친 공물-쿠키-은 잘 먹는다. 그리고 나를 찌른 칼은 롱기누스의 창처럼 성물처럼 너희가 곱게곱게 간직해야해."라고까지 읽으면 과해석일까요?
이런 뉘앙스로 영화를 보다 보면 구세대에 대한 미화나 군국주의 비판에 대한 회피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 어른이랍시고 내세우는 게 기타노 상이라는 점에서 참 답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저는 이 해석에 대해 그리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목할만한 해석이라는 생각 역시 들기는 하더군요. 어쩌면 일본에선 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여전히 불편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니면 창작물로서 유행이 지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여섯 번째 해석은 소년만화식으로 해석한 결과물입니다.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랑을 잃지 않은 순수한 이들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 너무 뻔한 이야기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작에서도 이들은 사고를 제외하면 거의 불살에 가까운 존재들이기도 하고요. 이는 바꾸어 말하자면 이들은 끝까지 친구들을 믿었고, 이들의 상실로부터 고통받은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결국 배틀로얄에서 살아남고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을 만든 국가에서의 감시에서도 벗어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위해선 여주인공의 왕따 설정이나, 주인공의 암울한 가정사정사 같은 건 그저 극복해야 할 과거의 상처즈음으로 격하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여주인공의 왕따 설정 자체가 영화상의 각색에 의한 것이라 작중에서도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여주인공은 인기도 많고 착하고 이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친밀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몇이나 있습니다만, 일단 왕따고 괴롭힘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실 재미없는 해석이긴 합니다. 워낙 극단적인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 무난한 것이라 이것저것 걸리는 것도 많고. 하지만 제일 무난하긴 할 겁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해석은 인간이 지닌 폭력성에 대한 탐구입니다.
몇 차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야기했지만, 아무래도 비중이 비중이고 소재가 소재다 보니 정말로 그렇지는 않죠. 이거 저거 많이 하고 메인 스토리에 영향을 준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한 게 없긴 합니다만, 여하튼 남주인공은 사고기는 했지만 몇몇 캐릭터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무엇보다 최후에 기타노를 쐈습니다. 여주인공은 배틀로얄 내에서는 공기에 가깝지만, 영화의 최후의 최후반부에 이 배틀로얄이 시작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는 노부의 칼을 지니고 있다 기타노에게 고백해 그를 기겁하게 합니다.
영화에서 노부는 작중에서 주인공의 내면 속 양심과 도덕성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캐릭터입니다. 노부가 남긴 말은 족쇄가 되어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계속해서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죠. 원작에선 그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고아원 동기기도 하고, 애초에 노부 자체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닙니다. 노부는 작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묘사된 선생시절의 기타노에게 시련을 내린 것이 직접적으로 묘사된 인물이었고, 이 인물의 행적은 기타노가 어떤 인물이냐를 떠나 막장인 세계관 속 영화 내적으로도, 청소년 범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의 관객들이 보는 외인 시선으로도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 너 때문이잖아"라는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작중에는 이런저런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면엔 폭력성이 위치해 있습니다. 남주인공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으로 인한 분노가 내재되어 있어 그를 폭발시켜 기타노에게 총구를 겨눴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여주인공도 왕따 등으로 인해 내재된 분노가 있었고 이러한 폭력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칼을 감추고 보물로 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예 폭력성을 쫓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도 있고, 다른 모든 지위를 떼어놓고 오직 순수하게 선생으로서의 관점으로 바라본 기타노는 "아이들을 두들겨 패면 이뻐 보인다"는 식으로 자신의 폭력성을 긍정합니다.
청소년기 폭발하는 호르몬은 청소년을, 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버린 이들에겐 공포와 이질감을 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시기의 이들을 대변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반항일 것이고, 이것은 곧 폭력성의 표출을 의미합니다. 이는 배틀로얄이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배경이 되어 줍니다. 물론 작중에선 반란군이 있을 정도로 막장인 세계관이고 이것인 폭력성의 보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흔히 폭력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실제로 똑같은 약물중독 문제라도 폭력성을 증진시키는 약물에 비해 폭력성을 누그러뜨리는 문제에 대해선 사회가 상대적으로 관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폭력성의 거세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요소기도 합니다. 사회는 결국 끊임없이 개인을 압박하기 마련인데, 지금처럼 복잡화되고 다변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이것을 완전히 해소할 수가 없거든요. 인권이 없는 것처럼 작중의 배틀로얄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하여 현대사회는 창작물을 통해 분출을 하건, 격투기를 통해 해소하거나, 스포츠 등을 통해 내놓건 하는 식으로 해소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잦아들지 않습니다. 마치 이러한 해소수단들을 없애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구는 이들이 존재하죠.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만, 여러 검열 등을 통해 이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 또 다른 폭력적인 조치인 셈입니다. 과연 진짜 폭력성으로 개인을 겁박하고 사회를 망가뜨리는 것은 누구일까요?
인간도 결국 동물인 이상 내재된 폭력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소재와 연출을 사용해서 말이죠. 배틀로얄은 이 폭력성을 해소하는 소재입니다. 영화 외적으로 건 영화 내적으로 건 간에 말이죠. 실제로 한 영화 평론지는 배틀로얄을 스포츠 영화로 분류하기도 했고, 작중에선 관리자들이 서로 내기를 걸고 배틀로얄내 상황을 즐기기도 합니다. 물론 영화는 현실일 때와 창작물일 때는 엄연히 다르다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전자는 어디까지나 창작물의 하나로서 평가한 것이고, 후자는 실재하는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기 때문에, 오직 유희의 수단으로 폭력성을 무절제하게 발휘했을 때 결국 파멸을 맞이하고 만다는 이야기도 함께 하죠. 창작물의 폭력성이 아무리 과도하다 한들, 현실의 그것과는 엄연히 다르고, 폭력성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인 이상 창작물인 배틀로얄에 대해 그렇게까지 날을 세우지 말라는 이야기기도 하죠.
인간의 폭력성을 부정하지 말아야 하고, 창작물이나 스포츠 등을 통해 해소할 수 있게 해 줘야, 인간은 보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을 모조리 부정하여 폭력성을 무제한적으로 거세하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한받지 않은 폭력성은 모두를 파멸로 이어가게 만들고, 이 폭력에는 실제 육체를 동원한 폭력도 있지만 검열시스템 등을 통해 감시하고 관리하는 사회의 시스템도 포함된다는 것이죠.
모두가 내재한 폭력성은 결국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일정 선까지의 폭력성을 받아들일 필요성에 대한 역설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나올 겁니다. "인생은 게임이다. 이 게임을 거쳐서 훌륭한 어른이 되어라." 뭐, 그 대사를 친 기타노 자체를 작중의 캐릭터들은 물론, 보기에 따라 영화에서 훌륭한 어른으로 딱히 보지 않기 때문에 딱히 설득력은 없는 대사입니다만 대충 논지는 이해가 갑니다.
배틀로얄은 파리대왕과 같이 우리 세상의 축소판을 섬에 펼쳐놓아 다양한 인간군상을 다루어내는 류의 작품입니다. 그 나사 빠진 각색으로 인해 제각각의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해석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도 딱히 이상한 포인트는 아니라는 겁니다. 워낙 등장하는 캐릭터도 많고, 영화와 만화, 소설 각자가 크게 히트를 쳐 서로가 서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도 못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