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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문

[영화 이야기] 여전히 원천은 코믹스에

90년대 한국에서

특히 공중파에서 방영된 미국의 애니메이션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흔히 세계명작극장을 떠올리곤 합니다만, 이건 일본에서 서양의 동화를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라 사실 영미의 애니메이션은 아니죠. 저같은 경우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일요일 오전 시간대를 지배했던 디즈니 만화동산의 일련의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한다면? mbc의 핑크 팬더나 내 친구 보거스, 던전앤드래곤 애니메이션 시리즈, 비스트워즈 등이 떠오릅니다. sbs에선 펠릭스 정도가 떠오르고, kbs의 마이티 맥스, 사이버탐험대 쟈니퀘스트 등이 떠오르네요.

 

예. 잠깐 떠올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숫자가 많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가장 많이 방영되기는 했습니다만, 미국 애니메이션도 그렇게까지 낯선 건 아니었습니다. 공중파에서 꾸준히 방영해주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비디오 테이프라 불리는 vhs를 통해 심슨이나 닌자거북이, 슈퍼마리오, 지아이유격대, 캡틴 플래닛 등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환경이었거든요. 심지어 이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시리즈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슈퍼히어로물이 대표적인 예일 겁니다. 실사 영화로 이미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배트맨 시리즈는 영화와는 또 다른 방향의 재미를 선사하며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크게 알렸습니다. 그 다음 순위로는 엑스맨 시리즈가 꼽힐 거빈다. 오락실에서 처음봤던 형형색색의 화려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것은 배트맨 시리즈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죠. 

 

그러던 중, 공중파에서도 하나의 히어로 애니메이션이 방영됩니다.

 

바로 오늘 이야기할 1994년작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시리즈죠.

 

94년작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은 당대는 물론 이후인 지금까지도 스파이더맨 콘텐츠에 나오는 모든 게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물론 영화, 게임, 코믹스 등등으로 계속해서 신작이 나오고 있는 현상황에선 그 정도까진 아니라곤 합니다만.

 

 

21세기 히어로 붐의 시작 스파이더맨

 

물론 20세기에도 히어로 영화는 있었습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시리즈, 맨인블랙 등등이 그렇죠. 하지만 히어로 단체가 아닌 한 명의 소시민이 가진 고민과 깨달음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스파이더맨 실사영화를 통해 충실히 구현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다크나이트와 더불어 가장 잘 만들어진 히어로 콘텐츠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꼽히는 이유기도 할 겁니다.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는 충실히 기원담부터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되는 간극은 몇년이나 되었고, 이에 대한 흥미를 해소시키기 위해선 다른 스파이더맨 콘텐츠가 필요했습니다. 영화가 담은 여러 이스트에그들을 즐기고, 또 스파이더맨의 방향성을 알기 위해선 거진 공부에 달하는 수준의 탐구가 필요했죠. 수십년이 연재된 작품이니까요. 거기다 슈퍼맨, 배트맨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스파이더맨 시리즈였기에 그 공부의 양은 가히 엄청난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kbs에서 방영되었던 스파이더맨 tas를 본 사람들은 그러한 공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의 한국내 기록적인 흥행에 대해 kbs에서 방영했던 애니메이션, 오락실 게임 등지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슈퍼히어로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히트가 어려웠었죠.

 

94년작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추천되는 스파이더맨 콘텐츠 상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단연코 스파이더맨 세계관을 다이제스트 격으로 전달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애니메이션 한 시리즈만 보면 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기원과 접근법,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나아갈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거든요.

 

오해는 하시면 안됩니다. 원작의 가장 충실한 구현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본편엔 그웬 스테이시와 같이 스파이더맨의 각성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준 캐릭터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을 다른 캐릭터들이 수행하죠. 그 외에도 일부 캐릭터들이 본편에서 수행하는 것과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체마다 기원을 달리 그리는 아이피에 있어 이 정도 차이는 충분히 감안할 정도이고, 이 자체도 상당히 매력이 있기 때문에 별개의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tas가 가진 오리지널 요소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블랙캣일 겁니다. 본작에서 블랙캣은 캡틴아메리카와 같은 강화인간입니다만, 원작에선 다소 다른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소니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건, 마블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건 등장할 거라 언급되는 캐릭터들 전부가 본편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방향성도 본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스파이더맨의 고유의 성질을 담고 있기에 이 작품이 지금까지 추천되는 거니까요.

 

 

 

다음은 누가 나올지 궁금해?

 

샘 레이미 이래로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단독 영화로만 벌써 8편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원담을 소화했고, 아예 이 8편을 묶어버리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당장 내일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는 끝났습니다. 할 말 다 했어요. 뉴욕 한구석에서 히어로 활동을 계속할 스파이더맨을 응원해주세요"라고 공식에서 말해도 아무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소화했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저 tas를 볼 필요가 있을까요? 대답은 YES입니다.

이후 개봉할 영화에 나올 크레이븐, 블랙캣. 실제로 시니시터 식스 등등 본작엔 유서깊은 스파이더맨의 대적자와 협력자 다수가 나옵니다. 한 십수년 전엔 '전부'나온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지만 말이죠.

 

이미 개봉 혹은 제작이 예정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상술했듯 쏟아져 나옵니다. 영화들이 어떻게 이들을 다룰 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캐릭터에 대한 최소한의 기원을 알고 가면 영화를 즐기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욱이 제작주체가 다르다보니 해당 캐릭터의 중심이 되는 줄기만 공유할 뿐 소화하는 방식이 제각각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원작격인 작품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아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크로스 오버에 대한 떡밥도 무궁무진합니다. 타고난 초능력과 후천적으로 얻은 능력자간에도 존재하는 간극에서 비롯되는 이야기가 바로 X맨과의 크로스오버에서 다뤄집니다. 어벤져스와의 충돌과 협력, 판타스틱4와의 에피소드, 그리고 닥터스트레인지와 블레이드와의 협력과 대립 등등도 그렇죠.

 

더군다나 tas엔 아직도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은 여러 소재들이 등장합니다. 친구의 타락, 나를 이해해주는 적도 아군도 아닌 매력적인 안티히어로 캐릭터,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연인, 비로소 인정을 받지만 정작 인정해준 대상이 사라져버리는 대형사건, 붕괴하는 자아와 그럼에도 나서야 하는 슈퍼히어로로서의 사명감 등등등...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은 사실 본 작을 본 사람들에겐 전혀 낯선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반가운 요소였죠. 미용실에 비치된 잡지에서 제가 이 장면을 보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아니, 치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첫째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해당 애니메이션의 위상이 높고 제작년도가 오래됨에 따라 몇 차례 온라인에서 무료로 공개되었던 바 있습니다. 본 블로그의 전신에서 해당 소식을 전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당시에도 한글자막이나 더빙 등이 제공되지 않아 감상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디즈니 플러스와 같은 ott엔 해당 작품이 아예 등록되지도 않은 상황이고요. 찾아보는 것이야 유튜브 등지에 비공식적인 경로로 풀려있으니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확실히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엔 공중파로 방영까지 된, 심지어 에피소드 전체가 방영된 몇되지 않는 미국 애니메이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여기엔 복잡하게 얽힌 스파이더맨의 영상화 판권이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제작된지 오래된 이 작품의 꼬인 저작권을 해소하기엔 여러모로 투자대비 이익이 적다고 판단한 거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죠.

 

둘째로, 애니메이션의 마무리가 어중간합니다. 이는 이후 연재되는 코믹스의 내용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종료했기 때문인데, "자, 너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냈으니 나와 함께 가자!"로 끝납니다. 지금까지 스파이더맨 콘텐츠가 지속되고 있으니 체감상 영 동떨어진 결말까진 아니겠습니다만, 이야기적인 완성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셋째로 작품 자체의 한계입니다. 만들어진지 오래되었기에 지금의 현란한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니, 당대 나온 최상위권으로 평가받는 다른 애니메이션들과 비교해도 분명히 빠지는 면이 있습니다. 거기다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모든 걸 담아낸다는 방식 때문이었는지 이야기적인 완성도보단 다이제스트처럼 정보전달에 더 초점을 맞춘 거 아니냐는 생각마저 갖게 합니다. 이는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장해주지만, 작품 내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문제도 함께 갖게 됩니다. 실제로 90년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애니메이션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평론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케빈 파이기였나요, 루소 형제였나요. 이야기 전개가 막히면 코믹스를 찬찬히 보고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고 했죠. 그게 지금에 와선 너무 편의적인 전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원천으로서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는 했지만, 30년이 다 된 이 시점에서도 이 작품이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기도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