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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문

[영화 이야기] 드라큘라 2000. 이식작일까 비틀기일까

특정한 장르의 영화를 늘어놓고 순위를 매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연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 순위는 제각각일 겁니다.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죠.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취향이고, 때론 타인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순위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래서 평론을 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리뷰는 참조용으로 봐라. 가장 좋은 것은 직접 영화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죠.

 

오늘 이야기할 드라큘라2000에 대한 제 생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에 대해 하고픈 이야기는 속편들이 더 많습니다. 괜히 속편들의 이야기를 먼저 한 게 아니죠. 하지만 영화의 자체적인 구조나 지향점을 논한다면? 이 영화도 그리 나쁘게만 평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전의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드라큘라2000은 사실 뻔한 영화입니다. 제목 그대로, 드라큘라가 2000년대에 부활해 사람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내용이죠. 실제로 이 작품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올리는 요소들이 많이 담겨 있으며, 사람에 따라선 단순히 아이디어를 따온 수준이 아니라 속편이나 이식작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제목을 짓는 방식부터가 지금와서 보면 참 올드합니다. 고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연도를 붙여 새로움을 부여하겠다는 건데- 이게 결국 원판이 되는 콘텐츠의 힘에 기대고 있다는 거거든요. 드라큘라2000부터가 여기에 완전히 부합하는 예이고, 에일리언 시리즈의 히트에 기댄 에일리언2020이라는 제목이나, 1편의 아성에 기댄 뽕 1996도 그러합니다. 또한 신세기에 접어드는 2000년이라는 시간대에 주목케하겠다는 의도가 있는데, 2000년은 이미 20년도 훨씬 전에 지나버렸죠. 블루스브라더스2000, 엠마누엘2000. 2020 원더키디 같은 콘텐츠들의 제목들은 이 콘텐츠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지금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뭐 이러나 저러나 해도 이런 식으로 알기 쉽게 제목이 지어지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고, 실제로 엄청나게 유행했습니다. 드라큘라3000이라는 영화도 있다고 하면 믿으실까요? 이렇게 특정 연도를 제목에 붙이는 게 어찌나 많았던지, 어느 언론에선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짓지 말라는 기사를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이름이 지어진 영화들은 지금와서 보면, 그러니까 제목만 봤을 때 말입니다. B급 영화라는 인상을 크게 받거든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적잖은 부분을 따왔습니다.

 

실제로 "알고 있지?"라고 하며 특정 장면이나 특정 캐릭터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생략하는데, 단순한 분위기 조성 정도로 알고 넘겨도 무방하고 실제로 영화 전체를 이해함에 있어 크게 무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만, 알고 있으면 보다 더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예컨데 영화 첫 장면 폭풍우를 건너는 배는 소설이나 92년작 드라큘라를 보지 않은 사람에겐 그저 대략적인 배경설명 정도로만 받아들여지지만, 이들을 접한 이는 1800년대 말 드라큘라 백작이 관속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하는 모습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시되는 설명만으로는 드라큘라를 가두고 있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 골동품 수집가 캐릭터도 그 이름에 '헬싱'이 붙는 순간 모든 게 말이되는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선 속편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상기의 이식작이라는 표현처럼, 설정을 따지고 본다면 속편은 아닙니다. 본작의 헤로인 메리와 그 친구 루시는 아예 소설의 미나 머레이와 루시를 그대로 따오다 시피한 것이고, 드라큘라의 세 신부와 그들의 익숙한 구도하의 주인공 위협은 아예 클리셰적인 장면에 해당합니다. 헬싱의 기원도 미나의 위기를 돕기 위해 온 의사라기보다는 아예 뱀파이어를 사냥하던 뱀파이어 사냥꾼에 해당하고요. 우습게도 작중엔 실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소설이 있어, 헬싱은 그를 두고 '조상님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 인지도 아닌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분은 골동품 수집 취미가 있는 의사였을 뿐이고, 나는 그런 조상님을 두고 뱀파이어 사냥꾼이라는 농담을 하는 것에 질렸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영화의 대체적인 플롯은 이러합니다.

 

아브라함 반 헬싱은 영국에 꽤나 큰 골동품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자신의 콜렉션을 늘려가는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지하 금고의 보물이 있었는데, 이것이 도둑들의 관심을 끌고 맙니다. 도둑들은 위험천만한 보안 시스템을 뚫어 물건을 빼돌리는데 성공하지만, 그 물건은 다름아닌 관이었고 심지어 그 관에는 바로 그 드라큘라가 갇혀 있었습니다. 이로인해 드라큘라는 헬싱의 감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고, 헬싱의 딸이자,자신과 영적으로 연결된 메리를 노리며 미국으로 향합니다. 헬싱은 그의 제자격인 에디와 함께 드라큘라를 추적하고, 드라큘라와의 영적인 연결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던 메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드라큘라를 파멸시키려 하지만, 이성을 유혹하는 드라큘라의 강렬함에 서서히 빠져들고 맙니다.

 

애초에 원작격인 드라큘라 소설부터가 헬싱 교수와 드라큘라 백작이 미나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거라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인데, 영화는 여기서 미나의 역할을 다소 부각시키고 헬싱 교수를 도중에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각색하였습니다. 루시의 남자친구나 하커의 역할은 에디에게 몰아주고요.

 

본작은 삼부작 가운데 가장 호러의 색체가 짙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미덕인 호러 장르에서 고전의 이식과 구태의연한 설정은 사실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뱀파이어, 햇빛을 쬐면 불타버리는 뱀파이어, 늑대 등으로 변신할 수 있는 뱀파이어, 십자가를 불쾌하게 여기는 모습, 물을 건널 수 없어 배를 타고 영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 등등은 정말 지겹도록 활용되어서 이젠 어떻게든 리파인해서 나오는 설정들이거든요. 소위 공략법을 뻔히 아는 관객들에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구성이 다채롭지 못해 흡혈귀들이 포지션이 어중간한 것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사람보다 강하다는 설정인데, 일반인에게 몇이나 되는 뱀파이어가 일방적으로 살해당합니다. 후속작의 우피지 신부마냥 단련된 뱀파이어 사냥꾼에게 당한 게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 뱀파이어라는 게 실존하는지도 몰랐던 일반인에게 썰려 나갑니다. 그렇다면 드라큘라라고 다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들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면에서 차별화되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뭔가 능력적인 우위에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심지어 갓 흡혈귀가 된 이에게 뒤통수를 맞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하고요.

 

정해진 결말로 향하는 과정이 어디선가 봤음직한 컷들이 나열되며 힘없이 늘어집니다.

 

고전의 이식이라는 미명하에 이야기 구조가 단순해질 수밖에 없는 요소들까지 따오며 뻔해진 설정들, 뱀파이어의 유혹에 흔들리지만 결국 더 큰 사랑으로 이겨낸다는 뻔한 내용 전개, 특정한 역할을 위해 소모여부가 뻔히 눈에 보이는 캐릭터까지.. 이 세 요소의 조합으로 인해 이 영화는 정말로 '뻔한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영화가 2000년대 초가 아니라 훨씬 이전에 나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94년에, 92년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개봉했던 게 현실이니까요. 실제로 드라큘라와 메리를 다루는 컷들을 보면 92년작 영화를 강하게 의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도 새로움을 전혀 가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 요소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영화는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런지도 모르겠네요.

 

첫째로 거머리 치료법이 있습니다. 본작에서의 헬싱은 소설에서 묘사된 헬싱 그 자신입니다. 그는 드라큘라를 파괴시키는 방법을 찾는 그날까지 죽지 않기 위해 드라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수명을 늘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다소 충격적인데, 바로 드라큘라의 피를 거머리가 빨게하여 거머리가 드라큘라의 피를 정화시킨 상태에서 그것을 자신에게 주사하는 것입니다. 드라큘라와 중독에 대한 메타포는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거머리가 끼어드는 것은 꽤나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드라큘라화된 거머리는 영화의 호러적인 색체를 강화해주는 좋은 요소였고요. ...비록 서두에 잠깐 나오는, 딱히 이야기의 전개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설정이 아니었을 뿐.

 

둘째로는 뱀파이어와 인간의 중간자적인 캐릭터의 활용입니다. 원작에서 미나가 소화했던 역할은 드라큘라의 추적과정에 대한 단서 제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본작에선 마리가 드라큘라의 뒤통수를 치고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죠. 여기서는 헬싱 교수와 그의 딸 마리가 그에 해당하죠. 원작에서도 미나가 수행했던 이 역할은, 본작에선 주로 마리가 소화합니다. 하지만 본작은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드라큘라에게 있어 자신의 힘을 태어날 때부터 이은 메리는 흡혈을 통해 만든 다른 뱀파이어와는 명확히 다른 존재였고, 신이 인간을 만들고 보살폈듯, 자신이 만들고 보살피고자 하는 세상의 편린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메리와의 문답은 그가 외면해왔던 신과 자신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영화의 최후반부, 영화는 비로소 여타의 뱀파이어 영화와는 다른 드라큘라2000만의 색체를 갖는데 성공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 설정이 다른 설정과 제대로 융화되지 못한다는 점이고, 다소 늦은 시점에 나왔기 때문에 급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겠죠.

 

셋째가 바로 드라큘라의 기원담입니다. 최근의 뱀파이어 콘텐츠는 최대한 종교적인 색체를 더는 방식으로 기능하곤 합니다. 그게 더 이야기를 만들기 수월한 것도 있지만, 이전 세대의 뱀파이어 콘텐츠들이 가진 종교적인 색체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새로움을 어필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정반대입니다. 종교적인 색체를 긍정하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갑니다. 이전의 뱀파이어는 섭리를 거부하는 언데드였기에 자연과 신성을 상징하는 십자가 등을 꺼리는 걸로 묘사되었었습니다만, 본작은 아예 애초에 드라큘라가 예수를 은화에 팔아버린 유다였다고 이야기해 버립니다. 충격적이고 문제적이기까지 한 이 설정은 영화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여타의 설정이 뒤집히는 와중에도 속편에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또한 드라큘라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목을 자르거나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과 용서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고요.

 

 

흥행에 실패해 결국 적잖은 설정이 폐기되었고, 이야기적인 연속성도 끊어졌지만, 애초에 극장용 영화였기 때문에 때깔 하나만큼은 비디오 영화인 후속작에 비해 우월합니다. 드라큘라 역의 제라드 버틀러를 비롯해 배우들의 면면도 훨씬 익숙한 것도 사실이고요.

 

2000년대를 즈음하여, 기존의 장르의 문법을 비틀면서 헤비메탈 음악을 바탕으로 강렬하게 어필하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매트릭스의 메가히트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당시 유행했던 음악씬의 영향을 받았던 걸까요? 당대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니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당시 이렇게 어필했던 영화 상당수는 B급 영화로 취급받았던 듯 합니다.

 

드라큘라2000도 그에 포함되는 영화였습니다. 독특한 설정이 몇 있었고, 흥미로운 컷 몇이 있었지만, 결국 다른 컨텐츠에 영향이 아주 짙었던 영화였죠. 저 개인에게도 92년작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어느 정도 묻혀버린 영화였고요. 그럼에도 문제적인 설정들은 후속작에 이어지며 트릴로지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었고, 한번쯤 볼 법한 영화가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