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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문

[영화 주절주절] 2002년작 스틸, 다시 보니 나름 괜찮네?

몇 학년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학기 중의 수업을 모두 마친 시기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기숙사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 밤마다 학교 교실에 모여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 보곤 했었는데 그 시절 봤던 영화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영화를 봤던 감상은 '용두사미'였습니다. 뭔가 시작 부분은 흥미로웠는데, 어느 순간 김이 팍 새어 버리고 결말도 흐지부지... 산만하고 이도저도 아닌 그런 영화였습니다.

 

물론 인상적인 컷들이 있었습니다. 몇몇 캐릭터는 상당히 흥미로웠죠. 또 몇몇 액션은 기가 막혔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보자면 작위적인 측면이 컸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중심에서 이끌어 가야 하는 메인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이었습니다. 영화의 종합적인 완성도를 놓고 보자면 사실 상당히 아쉬운 영화였죠. 실제로 여러 영화 평론 사이트에서 잘 쳐줘봐야 평작인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당시에 느꼈던 감상보다는 명백히 나아져 있었습니다. 아주 놀라웠죠. 구린 부분은 여전히 구리게 느껴졌고, 강점은 이전에 비해 흔해져 무뎌졌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상이 나아지다니. 더군다나 이 영화를 본 이후로부터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 머리는 더 굵어졌고, 당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콘텐츠를 봤죠. 평가의 기준이 바뀐 이유는 과연 뭘까요?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오늘 이렇게 타자를 두드립니다.

 

 

먼저 이 영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부터 합시다.

 

2002년 개봉한 이 영화는 캐나다, 프랑스, 영국이 합작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장르는 범죄물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 하이스트 무비에 해당합니다. 은행을 털다 정체 모를 이들에게 책 잡혀버린 주인공 일행이, 그들의 요구에 따르며 휘둘리다, 결국 그들로부터 벗어나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내용의 영화죠.

 

이 영화의 감독은 제라르 피레로, 우리에겐 레옹으로 유명한 뤽 베송과 함께 영화 택시를 찍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영화는 차량 액션씬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스틸 역시 이런 체이스 액션이 부각되는 형식의 영화입니다. 거기다 익스트림 스포츠까지 더해져, 액션씬 하나만 따지자면 그래도 이야기할 거리가 꽤 나오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영화의 원제는 Riders이고, 실제 영화에선 뭔가 훔치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더 부각된다는 인상도 듭니다.

 

21세기 초엔 '나쁜 놈 vs 더 나쁜 놈'의 구도가 유행했고, 무엇보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크게 화제가 되던 때였습니다. 그에 따라 이전과 차별화되는 방식의 이런 저런 시도가 이뤄졌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시도의 한 갈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실제로 거의 비슷한 접근법을 미국에서 개봉했던 트리플 엑스가 시도한 바 있고, 이는 지금까지도 분노의 질주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죠.  또한 상단에서 언급했던 택시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의 카메라 감독으로 참여했던 피에르 모렐 감독의 13구역 역시 이러한 시도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같이 언급된 영화들에 미치지는 못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여하튼, 이 영화는 익스트림 스포츠가 액션이 가미된 하이스트 무비입니다.

 

 

일단 나쁜 놈 vs 더 나쁜 놈의 구도부터 이야기해보죠.

 

주인공 일행은 선을 넘지 않습니다. 은행은 털어도 살인은 하지 않는다는 식입니다.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그들의 치명적인 매력을 더해주는 선에서 그칩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악동형 캐릭터죠. 이는 오락성이 강한 하이스트 장르에서 극악한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작용한 결과기도 합니다.

 

자연히 주인공과 대립하는 더 나쁜 놈에게는 이러한 선이 없습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그들은 절제되고 계획적인 주인공 일행과 달리, 마구 날뛰며 계속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며 훨씬 더 큰 피해를 끼칩니다. 그리고 주인공 일행에게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기도 하죠.

 

그런데 특이하게 이 영화는 '더 나쁜 놈'이 하나만 나오지 않습니다. 크게 잡으면 둘, 작게 잡으면 넷이 나옵니다. 문제는 더 나쁜 놈은 아니지만 주인공에 대적하는 세력이 추가로 또 있다는 점이죠. 예... 이 말만 들어도 산만하다는 인상을 받으실 겁니다.

 

사실 삼파전은 이야기에 흥미를 돋우고 깊이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3이라는 숫자가 가진 마력이라고도 할 수 있죠. 삼파전을 잘 다루면 기본 이상은 한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러한 요소를 살리지 못합니다. 삼파전의 매력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한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명쾌한 복잡성이 깊이와 매력을 더해주죠.

 

하지만 이 영화는 흔히 이야기하는 작위적인 클리셰, '외계인과 유령이 영화에서 같이 나오면 이들은 인간만 괴롭히지 절대로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처럼 기능할 뿐입니다. 사실상 이 '더 나쁜 놈들'은 주인공 일행을 괴롭히는 데에만 기능할 뿐 다른 상대는 없는 것처럼 굽니다. 등장하는 숫자는 많고 역할은 서로 나눠가졌는데, 정작 기능하는 바는 똑같으니 산만하고 지루하고 어색합니다.

 

이 영화에 이야기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세력은 크게 셋입니다. 주인공 일행, 마피아, 부패한 경찰. 주인공 일행은 익스트림 스포츠로 단련하여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은행을 텁니다. 이 과정에서 마피아가 자금 세탁을 위해 이용하던 증권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마피아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력에 주목한 부패한 경찰이 내부 정보를 활용하여 이들이 계속해서 강도짓을 저지르게 하여 돈을 빼돌립니다.

 

이렇게만 해도 사실 꽤나 복잡한 구도가 나옵니다. 세력으로야 셋이지만, 실제로는 세력당 등장인물들이 복수로 등장하니까요. 문제는 이 구도를 기묘한 방식으로 더욱 심화시킨다는 겁니다. 증권을 되찾기 위해 마피아는 해결사를 고용합니다. 이 해결사는 주인공 일행을 단박에 찾아내어 그들을 협박하고 마피아에게 바로 넘기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돈을 뜯어냅니다. 부패한 경찰은 부패한 경찰대로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감시자를 붙입니다. 그리고 이 감시자는 전형적인 트러블 메이커형 주인공이라 온갖 사건사고를 칩니다. 하수인격 캐릭터로만 기능해서 더 나쁜 놈들의 손발로만 기능해도 이야기가 복잡해지기 십상인데, 이들이 더나쁜놈들의 의사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기능하기까지 하니 이야기는 더 산만해집니다. 실제로 이 하수인들은 작중 하는 기능이 거진 동일하고, 이야기 전개상 합쳐도 무방합니다.

 

 

더군다나 대적자로서 경찰의 존재까지 있습니다. 보통 부패한 경찰이라는 포지션을 집어넣으면 대적자로서의 경찰의 정체성은 최대한 누그러뜨리곤 합니다. '일 다 끝나고 찾아오는 경찰'처럼 말이죠. 이는 경찰이라는 포지션 자체가 이야기에서 배제하기엔 그 영향력이 과도하게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이 대적자 경찰 포지션을 살립니다. 심지어 경찰의 내부 다툼이라는 사이드 스토리까지 집어넣어서요. 나타샤 헨스트리지가 연기한 형사 캐릭터가 나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에 기능하는 것으로만 따질 때, 상단에서 비판했던 '더 나쁜 놈들'의 하수인 캐릭터들보다도 못합니다. 아예 없는 게 더 나을 지경이니까요.

 

영화는 기본적으로 주인공 일행이 반격의 수단을 준비하고, 적이 주인공 일행을 위기에 빠뜨렸다가, 주인공 일행이 사전에 준비한 것들로 반전을 불러일으켜 역전한다는 구도를 따릅니다. 실제로 이야기에 흥미를 더하는 전형적인 구성이지만, 이걸 상단의 더 나쁜 놈들에게 계속해서 시도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감시자의 뒤통수를 치고, 해결사의 뒤통수를 치고, 부패 경찰의 뒤통수를 치고, 경찰의 뒤통수를 칩니다. 연속된 반전은 이야기의 흥미와 힘을 떨어뜨리는 요소죠. 더군다나 제대로 된 복선 없는 반전에 대해선 작위적이다는 비판이 따를 수밖에 없고요.

 

또 캐릭터의 문제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뭐든지 다 예측하고 대비하고 반격까지 하는 캐릭터지만, 정작 이야기의 대전제가 되는 은행강도 영역은 부패한 경찰이고 형사고 마피아고 해결사고 다 알아냈습니다. 전자를 따지면 만능 격인 캐릭터지만, 후자만 따지면 이렇게 어설플 수가 없습니다. 양자는 양립이 어렵죠. 이야기 전개를 위해 당위성을 해친 겁니다.

 

최종보스 격인 부패한 경찰 캐릭터도 이게 대체 뭔가...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경찰 내부의 자료를 활용해 은행강도들을 계속해서 사지에 내몰고, 그들이 훔친 물건을 빼돌려 경찰서 내 자신의 사무실에 보관합니다. 이렇게까지만 보면 뭔가 심볼릭한 캐릭터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언론에 신경 쓰고, 상사에 비굴하며, 서 내에선 온갖 의심을 사는 캐릭터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게 대체 뭔가... 싶습니다. 아주 열심히 자신이 파멸할 방법을 참으로 찾기 용이하게 경찰서 내에 숨기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게 베이스인 캐릭터임에도 정작 자기가 직접 행동하는 바람에 들통나 버리는... 한마디로 작위적이라는 거죠.

 

 

자... 이렇게 투덜투덜 꽤 많은 분량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 영화를 지금 시기에 다시 봤더니 그래도 이전보다는 낫구나 싶은 생각을 갖게 된 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왔군요.

 

첫째. 배우들 보는 맛. 영화의 주인공 스티븐 도프는, 2000년대 초중반에 들어가며 커리어가 꺾인 거 아니냐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이 영화를 전후한 시기를 기점으로 b급 영화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b급 영화 전문 배우라는 평을 듣곤 하지만 아역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다작하며 출연한 영화의 편수가 슬슬 100여 편에 달하는 시점이 되었고, 이 꾸준함을 바탕으로 한 재평가 바람도 살짝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촉망받던 유망주였고, 기본 이상은 하는 연기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그 외에도 여주인공격 캐릭터 카렌 형사를 연기한 나타샤 헨스트리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스피시즈로 유명한 모델 출신의 이 여배우는 한 때 b급 영화의 여신 소리도 들을 정도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배우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눈에 띄는 애정씬을 보였고, 나름 본인의 매력을 잘 보여줬습니다. 부서장 역을 맡은 브루스 페인도 던전앤드래곤 영화에 나왔던 악역으로 우리에게 유명하죠.

 

둘째, 비교적 익숙해진 프랑스 영화 문법. 사실 이 영화는, 영어로 연기를 하고 퀘벡에서 찍었다고 합니다만, 제작방식도 그렇고 감독도 그렇고 프랑스의 색이 짙게 배어 나올 수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다소 산만하고 뜬금없다는 인상에선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여타의 프랑스 영화들을 보고 나니 그래도 어느 정도 정서적인 공감이 이뤄지기는 하더군요. 참고로 영화의 연출이나 구성 외에 때깔이나 배경도 프랑스 느낌이 난다 싶기도 합니다. 제가 퀘백이나 프랑스에 가본 건 아니지만, 매체에서 쉽게 접하는 미국을 떠올리고 보면 확실히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셋째로 당시 이 영화와 같이 보았던 다른 영화들. 상술한 트리플 엑스는 액션의 끝까지 간다는 점과 익스트림 스포츠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보다 더 나은 인상을 줬습니다. 애초에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르는 주인공 일행은 일반인은커녕 적 캐릭터들과도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액션의 카타르시스 측면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옹박이나 13구역에 미치지 못했죠. 그렇다면 카체이스란 측면에선 달랐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전작 격인 택시나 제이슨 본 시리즈에도 못 미쳤죠. 그 외에도 당시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기로 장화홍련,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을 연달아 봤던지라 어설픈 오락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바닥을 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영화에 대한 기대치나 평균치가 당시보단 상당히 내려가게 되었고, 그 상황에선 소위 망작으로까지 불릴 영화는 아니다 정도로 평가가 바뀐 거죠.

 

 

결국 싫은 이야기만 잔뜩 하고, 좋은 이야기는 딸깍하고 마는 수준의 글이 되어 버렸네요. 재평가도 망작은 아니다 수준이니 사실 호들갑이 민망한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보는 게 나쁜 영화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의 블록버스터와 경쟁하는 오락물이 과연 어떠한 미덕을 갖춰야만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읽을 수 있기도 했고 말이죠.